집단행동노트(Collective Action Notes)
www.geocities.com/CapitolHill/Lobby/2379

이글은 1991년 『비판23호(Critique 23)』에 “아마데오보르디가,농업문제와국제혁명운동”이라는제목으로처음실린것을수정한것이다.

 

질적인인간공동체를향하여●●●●

 

오늘날의아마데오보르디가

 

 로렌골드너 Loren Goldner

1997년 8월발행집단행동노트Collective Action Notes

POB 22962

Balto., MD 21203

USA

전자우편 : cansv@igc.apc.org

 

번역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Policy and Information Center for International Solidarity)

십년간혁명적맑스주의자들은소련, 중국,그리고여타소위 “사회주의” 사회들이노동계급과인간해방을위한맑스의계획에대한부정이라는사실을알고있었다. 1918년 “러시아혁명”을쓴로자룩셈부르크를필두로마틱(Mattick), 코르쉬(Korsch), 보르디가,뜨로츠끼, 샤흐트만(Schachtman),혹은 CLR 제임스(CLR James) 등–극히일부만언급한것이다– 많은이론가들이유명한 “러시아문제”를풀기위해많은정력을바쳤다. 맑스주의자들에게있어러시아혁명의실패와스딸린주의의국제적성공의구체적의미말이다. 이논쟁에서발전된다양한견해는무엇보다도, 맑스주의나좌파와는거리가멀었던윈스턴처칠이내린정의, 즉소비에뜨체제는 “불가사의(enigma)로둘러싸인신비(mystery)로휘감긴수수깨끼(riddle)”라는말을확인하는것처럼보인다. “타락한노동자국가”, “국가사회주의”, “관료적집단주의”, “국가자본주의”, 혹은 “이행기사회”등의이론들의동시대상속자들은모두동구블록의 1989년이후의퇴화에대한각자의분석과설명–이들대다수는자기위안이다–을지니고있다. 맑스주의전통에특유한단련된낙관주의와더불어,이들경향대부분은 (필자자신이그러했듯이) 사멸해가는스딸린주의적관료제의당면한주요경쟁자는,마침내진정한사회주의를위해투쟁하는, 혁명적노동계급이될것이라고생각하곤했다. 거의누구도스딸린주의이후계승의주요경쟁자가혁명적맑스주의가아니라, 폰하이에크와밀턴프리드만에고취된맹목적인친서구신자유주의와전간(戰間)에생성된부활한권위주의적우파경향이될것이라는사실을예견하지못했다–유일하지는않지만가장특별하게는뜨로츠끼주의자들. 이들에게동구블록은표면적으로는서구보다사회적으로우월한토대에근거하고있었다–. 스딸린주의의사회적토대의사멸이맑스주의자체의심대한위기를수반하게될것이라는사실을예견한사람은이보다도적었다.동구블록의위기가소비예뜨나노동자평의회가아니라유혈적민중주의, 잔인한민족주의, 지방주의, 종교적근본주의, 반유대주의등을야기하고있기때문에(국제통화기금(IMF)반대, 시장반대정서들을조직하는데있어서어떠한좌파적반대도훨씬넘어서는권위주의적경향들), 동구나서구의혁명적맑스주의자들이 1917년이래의세계역사를이해하는데사용해온대부분의개념틀에대한재검토가필요하다는것은어느때보다도명확해지고있다.

다음글은이러한재검토에신중히공헌하기위해쓰여진것이다.이는이딸리아맑스주의자아마데오보르디가(Amadeo Bordiga, 기껏해야레닌이 『좌익공산주의, 유아적장애』에서비난한 “극좌파” 중의한명으로기억될뿐이다)의소련의성격에대한거의알려지지않은견해를제공하며, 보다일반적으로는보르디가에있어자본주의의특징에근본적인 농업문제(agrarian question)가, 20세기를지배한맑스주의의두가지변형물인사회민주주의와스딸린주의양자모두의역사에있어서사실상거의논의되지않은주요한점이라는명제를고찰한다.이글은유럽(그리고무엇보다도독일) 사회민주주의는, 겉으로는맑스주의적언사로말할때조차도, 맑스주의적프로젝트의국가주의적왜곡이었으며, 또한자본주의의보다높은단계, 즉케인즈주의적복지국가를위한학교에불과했다는명제를제출한다. 오늘날사라지고있는것은노동계급해방에서의장기적인국가주의적우회이며, 이는사실사회주의나공산주의라기보다는후진사회의산업화를위한부르조아혁명의대용물에가깝다고이글은주장한다.마지막으로, “수정주의”의승리에앞서는역사적인독일사민주의에관한전통적인장밋빛견해의주장은필연적으로막다른골목이나동시대를위한전망의결여로귀결될것이라고주장한다.역사는, 이론보다도앞서서, 사회민주주의와스딸린주의의국가주의적유산의잔재를쓸어버렸다.오늘날, 맑스주의적프로젝트가, 1860년대이래로계속해서,어떻게계몽된절대주의의국가주의적프로젝트와그것의계몽주의(Aufklaerung).나는독일어 Aufklaerung(계몽주의)를사용하는데왜냐하면이복합적사상이프러시아의공무원과,프러시아의국가주의적전통에깊이영향받은독일사민당의관료를통해노동자운동에들어왔기때문이다.이의상징적인물은페르디난트라살레이다.

판본과엉켜버렸는가하는문제는어느때보다도긴급한것이다. 물론이보다더욱긴급한것은이것이어떻게스스로를구출할수있는가하는문제이다.

소비예뜨경험에있어서농업문제의중심성에초점을맞추려는시도들은,그자체로는, 전혀새로운것이아니다. 학계의배링턴무어(Barrington Moore) 같은인물들은오래전에그러한시도를한바있다.. B. Moore, Social Origins of Democracy and Dictatorship (Boston 1966)

그러나무어의책이출간된 1960년대의분위기는여전히자본주의의본질로서의산업발전에초점을맞추었으며, 혹은무어가뜨로츠끼의영구혁명과불균등결합발전이론의핏기없는판본에불과한것처럼보였기때문에, 그의저작은맑스주의논의에아무런특별한영향을갖지못했다. 맑스주의로부터훨씬더멀었던애덤울럼(Adam Ulam)은냉전시기에맑스주의운동의진정한내용인농업문제에관해논의했다.. A. Ulam, The Unfinished Revolution, (New York, 1960)

그의목적은그것이자본주의가아니라저발전의산물임을보임으로써, “맑스주의”를폄하하는것이었다.울럼보다훨씬풍부한사실에기반했던거셴크런또한뜨로츠끼의그림자인듯이보였다.. A. Gershenkron, Economic Backwardness in Historical Perspective (Boston, 1962)

 

혁명적인반스딸린주의진영내에서, 20세기를통틀어농업문제에관한가장영향력있는맑스주의저작은의심의여지없이쁘레오브라젠스끼의 『신경제학(New Economics)』인데,이는, 그결점에도불구하고, 국제적인좌익반대파의운명을이해하는데필수적이다.. E. Preobrazhensky, The New Economics, Oxford 1965, Ch. Ⅱ.

쁘레오브라젠스끼의소농으로부터분리된 “사회주의적축적” 개념은로자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에많은빚을지고있다. 쁘레오브라젠스끼는역사상자본주의국가가맹목적, 유혈적으로실현한바–농업소생산자의공장노동자로의전환-를 “노동자국가”가의식적, 인도적으로실현할수있다고가정한다.(이러한전환을의식적, 유혈적으로실현하는것은스딸린의몫이었다.)

대부분의서구좌파가연관된이러한논의의가장자리에,매력적특징을지닌아마데오보르디가의사상들이있어왔다. 이딸리아공산당(PCI)의제1총서기이자그람시와더불어당의주요창건자였던보르디가는, 스딸린의면전에서그를러시아혁명의무덤파는이라고말하고(1926년)그이야기를하기위해살았던최후의서구혁명가였다. 그는그해이딸리아공산당에서축출되었고수천명의 “보르디가주의자”들이그를따랐다. 1928년 “이딸리아공산주의좌파(그들스스로가붙인이름이다)”는뜨로츠끼를 “국제적좌익반대파의수장”으로선출했고,이후보르디가와뜨로츠끼간에오랜교류가있었지만, 결국 1931-32년경완전한실패로끝나고말았다.그러나보르디가는이세기에있어가장독창적이고, 훌륭하며, 그리고완전히무시된맑스주의자중한명이다.(그의유산은그람시와는반대로전후이딸리아공산당의입맛에맞을수없었다.) 그는전쟁내내이딸리아에남아있었다.(그가전형적인방식으로코민테른에서축출되고쫓겨나자, 그는무쏠리니치하에서홀로남았고기능공이되고자했다.) 그러나어떤면에서, 현재를다루는보르디가의저작이진정으로흥미롭게된것은2차대전이후이다. 그는 1970년까지사실상어둠속에서살았으며, 1968년의갑작스러운출현에관해몇개의글을쓰기도했다. 전후그의임무는, 그의견해로는, 1917-21년의전세계적혁명의파고의 ‘이론적교훈들’을구출하는것이었다. 1945년의거의모든반스딸린주의혁명가들처럼, 그는이를위해 ‘러시아의불가사의’와의거래를청산하는게필요하다고느꼈으며, 러시아혁명과소비예뜨경제에관해세권의책(영어로는번역되지않았지만불어로는볼수있다)을저술했다.그는또한 3권으로된이딸리아공산주의좌파(자기정파를가리키는용어이며그역사는불행하게도 1921년에끝났다)역사를저술하였고소책자와논문집도상당수있다.. Ibid

그의저작상당수는과장되고어렵지만,수고롭게읽을만한가치가있다. 보르디가의견해에있어서비범하고이상하게도동시대적인것은, 아주단순하게도, 자본주의는농업혁명과같다는그의이론이다.그는이러한견해를 1914년이전에발전시킨듯하다. 농업문제에관한프랑스와이딸리아사회주의자들의입장에관한몇몇그의초기글말이다. 보르디가의궤적을좇는것이항상쉽지만은않다. 그는 ‘혁명적익명성’을신봉했으며, 개인숭배를혐오했고, 그의책을포함, 종종그의저술에이름을남기지않았다. 보르디가의러시아혁명평가는 “1917년 10월의50주년기념일의주변들에관하여”라는표제하에 1967년출간되었다..Bilan dune revolution, Programme communista, Nos 40-41-42, 1967년 10월호-1968년 6월호를참조하라.

이는진부한미국,영국, 프랑스,독일등의 (국가자본주의에관한)스딸린-뜨로츠끼논쟁의논의영역외부에존재하는무엇이다.(한예로, 보르디가는 “국가자본주의”라는용어를한번도사용하지않으며, 소비예뜨들이오래전에파괴되었다는점을인정하여 “소련(Soviet Union)”이라는용어도거의쓰지않는다.) 그에게있어서, 그것은다른자본주의들과크게다르지않은러시아자본주의였을뿐이다. 보르디가는국제적혁명운동을선점하고있는것을 “탈러시아화”하려는참신한욕망을갖고있었다. 역사적으로이전에도노동자운동이반혁명들에의해흔들린적이있으며(즉 1948년이후루이나뽈레옹) 러시아가전혀특별한경우는아니라고그는말했다. 한편,러시아경제에관한 25년에걸친그의선취는이러한냉정함과모순된다.(흥미로운점중하나는그가 1975년시작된다음번세계위기에종결된, 장기적인자본주의적팽창과노동자의개량주의를 1945년에예측했다는점이다). (1945년이후발전된)보르디가의러시아분석은다음과같다. 그의정파가 20년대분파투쟁동안주로소비예뜨/코민테른의외국정책과관련된이유로뜨로츠끼를전적으로지지한반면, 보르디가의분석은, 궁극적으로는”부하린주의”적이유들로,좌익반대파의초(超)산업화전략으로부터거리를두었다. 1945년이후그는부하린의전략같은것만이, 볼셰비끼당을파괴하지않을것이기때문에, 이체제의국제적인혁명적성격(보르디가에게는러시아의산업화보다중요했다)을보존할수있다고생각했다. 1924-28년간의분파투쟁기에, 부하린은뜨로츠끼의좌익적 “초산업화” 전략의수행은역사상유례없는거대한국가관료제에의해서만행해질수있다고말했다..쁘레오브라젠스끼에대한부하린의비판에관한논의를보려면 Bilan d’une revolution, pp.139-140 참조. 좌파의초산업주의자들에반대하면서, 부하린은노동계급이 “거대한행정기구를건설하게될것”이라고말했다. “모든소생산자와소농민을관료로대체하려는시도는너무거대해서그것의유지비용이소생산의무정부적조건에기인하는비생산적지출보다훨씬큰기구를낳게될것이다. 요컨대프롤레타리아국가의전체경제기구는생산력의발전을촉진하지않을뿐만아니라사실상이를가로막는다.이의직접적결과는예정된바의정반대가되어버린다.”(ibid)

스딸린이좌파의강령을훔쳐서이를실행에옮길때, 그는, 뜨로츠끼스스로가러시아의자기정파가스딸린에투항한후간접적방식으로인정했듯이, 부하린을전적으로승인하였다.. 1928년이후스딸린의 “좌”선회에대한뜨로츠끼의평가의 “부하린주의적”측면은 Bilan d’une revolution에언급되어있다. op.cit., p, 148.

보르디가는러시아혁명과소비예뜨체제의국제적성격이라는사상을뜨로츠끼보다더욱진지하게견지하였다. 그에게있어서 “일국적사회주의”라는사상은맑스주의가표상하는모든것의기괴한추행이었으며, 그것은물론그러했다. 1926년모스크바에서스딸린과최후로대결하면서,보르디가는, 노동자운동의초국적현실의증거로서, 세계모든공산주의정당이소련을공동으로통치할것을제안하였다.. 이러한개입은 1926년 6차코민테른총회확대집행위원회에서이루어졌다. ibid. p. 38.

말할것도없이,이러한제안은스딸린과그의동료들의냉담한반응을받았다.

그러나이는단지시작일뿐이다. 소비예뜨경제의자본주의적성격에관한보르디가의저작은, 뜨로츠끼주의자들의것과는대조적으로, 농업부문에상당히초점을맞춘다. 그는자본주의적사회관계들이어떻게꼴호즈와소브꼬즈에존재하는지를보여주고자했다. 전자는협동농장이고후자는철저한임노동국영농장이었다.. 꼴호즈의자본주의적성격에관해서는, Bilan d’une revolution, pp. 172-179 참조.

그는농업생산의상당량이소규모사적소유소토지에의존하고있음을강조했고(그는 1950년에글을쓰고있었다), 1880년대에서 1914년까지러시아가대규모밀수출국이었던이후소련이밀수입을시작하게될속도를정확히예견했다.

보르디가가산업부문을경시하고농업을강조하게된이유들은,내가말한대로, 러시아혁명을앞지른이론적, 전략적관심때문이었다. 다시한번, 보르디가에있어서자본주의는무엇보다농업혁명, 즉농업의자본주의화였다. 이러한관심들때문에, 보르디가는부하린에관한평가에있어서스딸린주의에대한전형적인혁명적반대자들과다른견해를견지했다.그는레닌과뜨로츠끼간에새로운구분을도입했다. 레닌과뜨로츠끼를구별하는대부분의사람들은스딸린주의자이거나마오주의자들이다. 그러나보르디가는스딸린주의자들과의형세를완전히역전시킨다. 레닌의공식을원용하면서, 보르디가는러시아혁명을 “이중혁명”. “이중혁명”이라는보르디가의개념은그의저작전체에걸쳐나타난다. 한에를보려면 A. Bordiga, Russie et revolution… p. 192 andff 참조.

이라고부른다. 이중혁명에서는프롤레타리아에의한정치권력의장악이부르조아혁명의과제들, 무엇보다도농업에서의전자본주의적사회관계들의파괴를완수하는것이가능해진다. 후자의위대한모범은물론 1789년프랑스의 8월이었다. 1917년 4월영구혁명을수용함으로써 “레닌은뜨로츠끼주의자가되었다”고뜨로츠끼주의자들은항상말해왔다. 하지만레닌은뉘앙스에있어서사실뜨로츠끼에동의한적이없고, 이는신체제의성격에관한 1920-22년의그의공식화, 특히1차노동자반대파와소비예뜨국가가 “국가자본주의”라는그들의주장에반대하는그의논쟁과정에서 1921년당대회에서행한그의유명한연설을통해확인된다. 이에답하면서, 레닌은국가자본주의가과거의러시아,즉노동계급정당이국가를통제하는소생산자자본주의로부터의거대한전진이될것이라고말했다.. V. I. Lenin, “The Tax in Kind (The Significance of the New Policy and Its Conditions)” in Collected Works, Vol. 32, pp. 3 29-369,에는 1921년의소생산자자본주의와국가자본주의간의관계에대한레닌의분석이담겨있다.

보르디가에게,이와같은노동계급의정치적표현이스딸린주의에의해파괴되면, 남는것은소생산자자본주의뿐이었다. 20년대초반 “관료적으로타락한노동자국가”라는용어를레닌이사용한것은 1936년에뜨로츠끼가동일한용어를사용한것과는상당히달랐다. 여기서이문제에대해누가무엇을말했는가하는전개과정전체를요약하는것은불가능하거나불필요하다. 이들서로다른전략적, 전술적판단배후에숨어있는것은맑스주의에대한두가지대립되는개념이다. 중요한것은,뜨로츠끼나뜨로츠끼주의자들에게혁명의영구적성격이 “소유형태”들로응결되었고이후에생산력의성장속에서표현되었다는것이다. 보르디가에게있어서,생산력의성장은소비예뜨현상의부르조아적성격의증거에불과했다.뜨로츠끼의문제가농민에대한 “과소평가”가아니라농민들과소생산자들의농업혁명이프롤레타리아혁명과관계를가질가능성에대한그의 과대평가였음을언급하면서, 보르디가는스딸린주의자들을거꾸로세워놓았다.

보르디가의개념속에서, 스딸린과그이후의마오, 호치민등은 19세기적인의미에서 “위대한낭만적혁명가들”, 즉 부르조아 혁명가들이었다. 그는1945년이후등장한스딸린주의체제가부르조아혁명의연장, 즉농업정책과생산력을발전을통한적군에의한프러시아융커계급의몰수에불과하다고생각했다. 1945년이후이체제를국가자본주의라고비난한프랑스극좌파그룹 “사회주의냐야만이냐”의논제에대하여,보르디가는스딸린주의의유일한실질적내용으로부르조아혁명적측면을제창한 “야만인들앞으로!(Avanti Barbati!)”라는글을통해응답하였다.. Grilli, op. cit. p. 282에서인용.

(이것이동유럽, 중국,혹은인도차이나의스딸린주의자들을제국주의에붙어먹으려는덜덜떠는 “개량주의자들”로간주한뜨로츠끼주의자들의 1945년이후의분석의어리석음보다조리있는관점이라고보르디가에게동의할필요는없다.)

뜨로츠끼에대한보르디가의문제틀의진보는무엇보다도, 뜨로츠끼주의와서서히뜨로츠끼주의로전향한사람들의작업에침투한가정,즉스딸린과스딸린주의가부하린주의우파와뜨로츠끼주의좌파사이의 “중앙”을표상한다는가정에대한그의비판이다.우리는산업화논쟁에서부하린주의 “우파”의승리가스딸린주의 “중앙파”의승리가실제로한것보다국제노동자운동에얼마나많은해를끼쳤을지상상할수있을뿐이다.하지만 1924년이후뜨로츠끼를통한맑스주의의연속성이라는무비판적선을그리고자하는사람은이와같은 “좌에서우로의” 스펙트럼과그것의결과를암묵적으로인정한다.

1936년뜨로츠끼는 “사회주의는 『자본(Das Kapital)』의 페이지 상에서가 아니라…철강,콘크리트, 전기의언어속에서승리의정당성을보여주었다”고썼다.. Trotsky, Revolution Betrayed, (New York, 1972), p. 8.

소비예뜨들의형성(1905, 1917)으로부터국가소유형태들로, 생산력자체의발전(즉”제국주의의쇠퇴기”에산업을발전시킬능력이라는소련체제의타락한사회주의적성격의증거)으로영구혁명의이론을확장시키면서, 뜨로츠끼는제2인터내셔널과제3인터내셔널맑스주의의 “부르조아혁명대용물”이라고내가지칭한것에서정점에달했다.

전후의뜨로츠끼주의자들(물론뜨로츠끼는그들에책임이없다)은제삼세계가어디에서도발전의징후를보이지않은기간동안있었던스딸린주의정권들의산업화를그들의타락한사회주의적성격의결정적증거로보았다.이러한태도에반대하며보르디가는말했다. “공산주의를건설하는것이아니다.” “생산력발전”의과제는공산주의자들의임무가아니다. 그는또한덧붙였다. “‘사회주의의기초들’이소련에서건설되고있다는것은확실히맞다.” 그에게있어서, 이는정확히소련체제의부르조아적성격의증거였다.

1920년대의분파투쟁의유산을검토하지않고뜨로츠끼주의의친스딸린주의적편향에서단절한하나의중요한흐름은샤흐트만주의적전통과그것의 “관료적집산주의” 분석이었다.이들의 1940년대판은적어도, 스딸린주의의세계정복동학(dynamism),즉신기원을위해자본주의를계승하는사회주의의경쟁자를보는데, 최근의역사는이것이오류임을보여주었다. 아울러샤흐트만주의의비판에있어서, “민주주의”의문제에모든강조점이두어지는데,그들에게민주주의는본질적으로전부이다. 사회주의는사실상 “민주적집산주의”로간주되며, 따라서그것의부재와자본주의양상들의외양의부재는 “관료적 집산주의“임이틀림없다. 다시말하자면, 스딸린주의와뜨로츠끼주의와의이전통의전반적인불일치는 1917년이나 1921년이후러시아에서벌어진사태가 반민주적이었다는사실을둘러싸고전개되었다. 물론이는굉장히중요했지만, 그것의영향은뜨로츠끼와뜨로츠끼주의자를관통하는 “연속성” 전체를암묵적으로인정하는것이고, 부하린의통찰력과소련에대한그의예측을무시하는것이다. 즉,전체전망(샤흐트만주의적전통은정치경제(학)에대한맑스의비판을철지히망각한다)은관료제/민주주의라는상대적문제설정을둘러싸고전개되었으며, 따라서, 뜨로츠끼처럼, 제2인터내셔널과제3인터내셔널의맑스주의로침투한부르조아혁명의 “과제들”의전체개념속으로삽입되었다. 보르디가를제외하고는, 반스딸린주의혁명좌파어느누구도 “생산력발전” 추진자체를소련이일종의노동자국가가아니라는 증거로인용하지않았다. 뜨로츠끼주의자들에게있어국유화와계획의틀내에서그것은물론소련이노동자국가라는결정적증거였다.

그러나보르디가는더많은것을덧붙였다. 그자신기술자로서, 보르디가는그로하여금사태를다른방식으로보게하는데있어서분노시키고효과적이게하는, 일종의이론적엄격성을보여주었다. 그는본질적으로 “공산주의적강령”이 1847년맑스와엥겔스의선언을통해수립되었고그다음해프랑스와다른곳의노동자운동에서공산주의적경향이등장함으로써확증되었다고믿었다. 그는본질적으로맑스와엥겔스가 “불변의” 방법론을수립하였고, “혁신자들”은항상베른슈타인주의나그와유사한것으로이르는도상의현명한부르조아속물이라고생각했다. 그러나 1848년수립된원칙들에대한이와같은감동적자세는그로하여금맑스주의전통, 다시한번상당부분잊혀진전통의전체차원에관한놀라운결론으로귀결되게하였다. 보르디가는 1883년맑스의죽음으로러시아문제에관한중요한모든것은말해졌다고믿었다.. 러시아공동체(commune)와자본주의단계를뛰어넘을수있었던러시아의잃어버린 “역사적기회”에관한논의를보려면, Bordiga, Russie et revolution dans la theorie marxiste, pp. 226-297 참조.

즉, 1870년대맑스의인민주의자들과의서신왕래, 그가죽을때남긴 3평방미터에이르는러시아농업에관한언급들(그는생애마지막 10년간러시아의농업문제에열중했기때문에 『자본』을끝마치지못했다), 그리고그가러시아에몰두했음을반영하는선언의다양한새로운서문들과 1878-1883년간의다른저작들.(그는이러한관심의정도를엥겔스에게조차말하지않았고, 엥겔스는러시아문제에관한작업이자본의미완성의실질적이유임을알고는격분했다). 맑스의생애마지막 10년간러시아농업문제에깊이관여했음을보려면, Teodor Shanin의에세이 ‘Late Marx’를참조하라. T. Shanin, ed. Late Marx and the Russian Road, New York 1983. 또한 J. Camatte, Bordiga et la revolution russe…, pp.15-23

 

보르디가에게중요한것은맑스가러시아공동체(commune)를발견한것이었으며, 공동체에기반하여러시아가역사의자본주의적단계를말그대로뛰어넘을수있다는, 서구의혁명이부재하더라도그렇게할수있다는, 그리고농업의자본주의화에우선하여농민들이이과정에서중심적일수있다는, 1878-81년동안맑스가향유한믿음이었다. “만약러시아가 1861년이후밟아온경로를따른다면, 역사가민중에게부여한위대한기회, 즉자본주의체제의숙명적대안들을뛰어넘을기회를놓치게될것이다. 다른모든나라들처럼, 러시아는체제의냉혹한법칙에굴종하게될것이다”라고 (베라자술리치에게보낸유명한편지에)맑스는썼다.. 1877년 11월의맑스의편지는독일어로간행되었다. Maximilian Rubel, ed. Marx-Engels. Die russische Kommune(1972), pp.49-53.

죽기직전맑스는러시아가기회를잃었다고판단했고, 인민주의자들에게도그렇게말했다. 보르디가에게있어서, 앞서의인용문은 “러시아문제”에관한맑스주의의유산이었고, 스딸린이완성한 “자본주의적축적의유혈적과정전체”에대한예언이었다. 맑스의러시아에대한관계의이러한모든측면은 8, 90년간먼지쌓인서고와각주들에서썩었으며, 최근에야자끄까마뜨(Jacques Camatte)와테오도르샤닌(Teodor Shanin) 같은사람들에의해부활하였다.. 각주 18 참조.

 

민주주의에관한그의태도를언급하지않고서는보르디가를제대로묘사할수없다.그는스스로를자랑스레 “반민주적”이라고정의했으며이문제에관해자신이맑스, 엥겔스와함께한다고믿었다.(농업문제에있어서의관계는확인될것이다.) 민주주의에대한보르디가의반대는스딸린주의의악질행위(gangsterism)와는아무관련이없다. 사실,그는파시즘과스딸린주의를부르조아민주주의의정점이라고보았다!. 1921-24년간의이탈리아파시즘에관한보르디가정파의분석들은, 그일부는물론보르디가자신이쓴것인데, 다음에서볼수있다. Communisme et fascisme, (Ed. Programme communists, 1970)

보르디가에게민주주의는무엇보다도무정형의대중으로서사회를조작하는것을의미했다. 그는이에 “프롤레타리아독재”를대당시켰는데, 이는선언에서표명된원칙들과강령에기반하여 1847년창건된공산당이수행하는것이었다. 그는종종 “혁명전야에모든반동세력들은 ‘순수한민주주의’ 하에서우리에대립될것이다”라는엥겔스의언명에나타난정신을언급하곤했다. (사실, 1921년군주제주의자에서무정부주의자에이르는볼셰비끼의모든반대분파는 “볼셰비끼없는소비예뜨”를요구하였다.) 보르디가는다원적견해들의민주적과정의산물로서의혁명적내용이라는사상을절대적으로거부했다. 지난 70여년의역사에비춰진이의문제점이무엇이건간에, 이러한전망은공산주의가 (다른모든사회구성체들처럼) 무엇보다도형식들을통해표명된강령적내용에관한것이라는사실을강조하는장점을지닌다. 이는맑스에게있어서공산주의가성취되어야할이상이아니라일련의강령적임무와함께낡은사회로부터태동한 “현실적운동”이라는사실을강조한다.. 맑스가선언에서말했듯이,공산주의는실현되어야할이상이아니다. 그반대로공산주의는 “우리눈앞에서전개되는현실적운동일뿐이다”. “현실적운동”으로서의공산주의에관한논의를위해서는, Jean Barrot의논문, “Contribution a la critique de l’ideologie ultra-gauche(Leninisme et ultragauche)”를참조하라. Communisme et question russe(Ed. de la Tete de Feuilles, 1972), pp. 139-178.

“경제문제”가 “풍요로운사회”에의해사실상제거된것처럼보인 1960년대의신좌파적분위기속에서, 논쟁은거의절대적인관료제/민주주의대당설정과 “조직형태들”을둘러싸고벌어졌으며, 세계경제위기가투쟁의모든규칙들을변화시킨 1973년이후거의이용되지않은방법론적형식주의로귀결되었다. 다른맥락에서, 보르디가는그의러시아자본주의론에서자본가계급의정체를확인하라는압력을받았을때,그것은러시아경제의간극들안에, 형성중인계급으로서존재한다고말했다. 그에게있어, “국가자본주의”라는사고는터무니없는것이었는데, 왜냐하면국가는단지계급이해의매개자일수있을뿐이기때문이었다. “국가”가생산양식을수립하는등의무언가를하는것은맑스주의의포기였다. 보르디가에게있어서, 소련은자본주의로 이행중인 사회였다..이는 L. Grilli, op. cit. p. 38.에의해정교화된다.

이러한형식주의비판은정치적결과들도갖고있었다.그것은공산당의역할에대한보르디가의개념에결합되어있었다. 보르디가는 1921년코민테른의우선회에단호히반대하였다. 이딸리아공산당의총서기로서그는 3차대회의 “통일전선” 전략의이행을거부했다.다른말로하면, 그는새롭게결성된이딸리아공산당–이는보르디가주의에지배되고있었다–과당이막분리되어나온이딸리아사회당의좌파와의연합을거부하였다. 보르디가는코민테른과는전적으로다른당에대한견해를갖고있었다. 1921년당시코민테른은영러무역협정, 크론슈타트,신경제정책의수행, 분파의금지,독일 3월행동의패배등으로나타난혁명의쇠퇴에적응하고있었다. 보르디가에게있어서, “통일전선”을통해사회민주당좌파대중을흡수함으로써이러한쇠퇴에맞선다는서유럽공산당의전략은, 그가보기에이제막시작한반혁명적쇠퇴기에대한완전한굴복이었다. 이것이민주주의에대한그의비판의핵심이었다. 왜냐하면코민테른이좌파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모든종류의강령적양보를하는것처럼보인것이 “대중의획득”이라는이름을통해서였기때문이었다. 보르디가에게있어서, 강령은모든것이었고, 입장객수라는관념은아무것도아니었다.. 역주 – ‘program’은 ‘강령’이라는의미로도쓰이고 ‘진행순서’라는의미로도쓰인다. 여기서는이러한이중적의미를가지고입장객수라는말장난을하고있다.

쇠퇴기에있어서의당의역할은강령을보존하고조류가바뀔때까지가능한선전선동활동을하는것이었지, 덧없는대중성을좇으며그것을희석화시키는것은아니었다. 이러한구상에대해논박이있을수있는데, 분파의폐쇄적세계로귀결될수있지않은가하는것이며, 보르디가주의자들은분명그렇게되었다. 그러나이는국제적좌익반대파와그의상속자들인뜨로츠끼주의분파가몰랐던또다른진실을강조하는장점이있다.러시아외부의 “대중”정당들이 1920년대중반에걸쳐스딸린주의를받아들였을때,그토대는 1921년의전환에의해기초되었다는점이그것이다. 이를보면보르디가의반민주주의적견해를받아들이는것은거의불필요하다. 그는러시아,독일, 이딸리아등에서의소비예뜨와노동자평의회의역할을완전히놓쳤거나깨끗이잊어버렸다. 그러나 1921년통일전선이서구공산당들의미래–1924년이후그들의 “볼셰비끼화”–에미친 “사회학적” 결과들이라는점에있어서, 보르디가는옳았고코민테른은틀렸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1924년 이후의 스딸린주의의 많은 사회적 기반이 1921년의 통일전선전술을 통해 서구 공산당들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자체에서이에필적하는것은 ‘레닌소집’이었는데, 이에의해당은친위대의유물에맞서스딸린주의자들이쉽게조작할수있는온순하고, 경험없고, 혹은단지출세지향주의적인당원들로넘쳐흘렀다.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이러한전환의국제적복사판은프랑스공산당의까솅(Cachin)이나독일공산당의탤만(Thaelman) 같은인물이었다.

보르디가는 “더많은민주주의”라는공허한외침속으로가라앉지않고 (뜨로츠끼가패배한 1927년대신에) 1921년의세계공산주의운동의근본적타락을보는방법을제공하였다.뜨로츠끼주의전통이코민테른역사의이중요한시기를다룬관료제/민주주의라는추상적이고형식적인시각은어떠한내용도갖지못하게되었다. 보르디가는자신의전생애에걸쳐스스로를레닌주의자라지칭했고레닌을직접적으로논박한적이없지만, 1921년정세와이것이코민테른에미친결과에관한그의전적으로다른평가,그리고통일전선문제에관해레닌과뜨로츠끼에대한그의반대는 20년대국제적좌익반대파내뜨로츠끼주의세력의상속자들이보지못한하나의전환점을던져주고있다.

자본주의는농업혁명과동일물이라는보르디가의사고는 20세기에대한실마리이다. 이는분명좌파가 20세기의 ‘혁명적인것’이라부르는거의모든것에대한실마리이며, 맑스주의의역사와, 세계경제의후진적지역을산업화하는이데올로기들과맑스주의와의얽힘을재고하기위한실마리이다.

보르디가는분명국제혁명운동이세계를볼수있는 “렌즈”의 “탈러시아화”에대한실마리를주지는않는다. 그러나농업문제에대한그의관심은더욱발전된다면그러한것을줄수있다. 1970년대중반까지, “러시아문제”와그것의함의는유럽과미국좌파의정치적전망에서피할수없는”패러다임”이었지만, 15년이지난지금에는낡은역사인것처럼보인다. 당시는 1917년에서 1928년에이르는기간의러시아혁명과코민테른의역사를다달이다루는자세한연구가전체로서의세계에실마리인것처럼보이는정치적환경이었다.만약누군가러시아혁명이 1919, 1921, 1923, 1927, 혹은 1936년이나 1953년에패배했다고믿는다고말했다면, 그사람은세계의다른모든정치적문제에관해자신이생각하는바에대해상당한인식을가지는것이었다. 즉소련, 중국의성격, 세계공산당들의성격, 사회민주주의의성격, 노동조합들의성격, 통일전선, 인민전선, 민족해방운동,미학과철학, 당과계급의관계, 소비예뜨와노동자평의회의중요성, 그리고룩셈부르크나부하린이제국주의에관해옳았는지하는문제들에관해서말이다.

1975년이후세계사의주요사건들을열거하는것만으로도세계가변화된바를바라보는우리의방식이얼마나심오한가를볼수있다.새처의영국, 레이건의미국, 미테랑의프랑스, 고르바초프의러시아, 덩샤오핑의중국, 즉사회민주주의, 스딸린주의, 케인즈주의, 제삼세계보나파르티즘등의국가주의를압도해버린 (이용어의폰하이예크/폰미제스적인의미에서) “신자유적” 조류라는 1980년대의현실을생각해보기만하면된다. 1917년에서 1928년에이르는러시아혁명에관한철저한지식과이로부터파생된 “세계관”은 76년이후중국의진화과정, 고르바초프하의러시아, 신흥공업국의등장, 중국/베트남/캄보디아전쟁, 서유럽공산당의붕괴, 영국노동당, 미국민주당, 독일사민당내에서의우파의철저한억제, 미테랑의신자유주의로의진화, 혹은메히꼬나인도같은중상주의체제에서조차나타난중요한 “반국가주의적”흐름들의등장등을제대로길잡이할수없다. 성직권주의적민족주의를과다복용한폴란드의노동자운동,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등에서의근본주의의부활, 탈산업화, 고기술, 고급주택화등을이목록에덧붙일수도있다. 이들사건중어느것도맑스주의의신뢰도를떨어뜨리지는않지만, 러시아혁명과그것의운명으로부터상속한렌즈를통해현실을보려는 70년대까지의서구좌파에사실상보편적이었던경향의신뢰도는떨어뜨린다.

주요한 “제삼진영(Third Camper)”이 70년대중반이후사멸일로를걷던국가주의적정치구성체들에관해표면상으로는어떠한환상도갖고있지않았지만,독일사회민주주의와러시아볼셰비즘의영웅적국면의최대치도이러한새로운현실에길잡이가되기에는충분치않다.그러나이러한 “제삼진영”은, 자본주의적세계시장이제삼세계의어느곳도산업화할능력이없다는스딸린주의의숨은가정들과더불어, 레닌의”제국주의”와코민테른의최초 3개대회에서나온일련의예측들을받아들였고그와동시에신흥공업국의등장으로혼란에빠지게되었다..전세계적인신흥공업국의등장과이데올로기에대한이들의영향에관해서는 Nigel Harris, The End of the Third World, (London 1986) 참조.

그러나더깊은수준에서혼란이있는데,이는제2, 제3인터내셔널에서파생된혁명적정체성의심장부를때리는것이다. 왜냐하면, 만약누군가 1920년에서 1975년사이유럽에존재하던전투적인대중공산당이나체제들의 “지도”를그린다면, 이는 1648년과 1789년간의계몽전제국가의지도와거의그대로일치하기때문이다. 즉,프랑스, 독일,러시아, 스페인, 포르투갈, 스웨덴(가장중요한스칸디나비아공산당이며 2차대전이후에도분파이상의힘을유지했다) 등이바로그것이다. 영국, 미국,네덜란드, 스위스, (그리고호주, 뉴질랜드, 캐나다같은영어권 “이민국가”) 등에는대중적인공산당이부재하다. 명백한예외는이딸리아공산당이다. 그러나이딸리아는주요한지방적중상주의도시국가와더불어계몽된절대통치(statecraft)의원형들을산란했으며, 지역적으로이딸리아공산당의세력기반은구체제의역사적국면동안이루어진각기다른지역적경험과관련되는것처럼보인다.결국이딸리아공산당은 1956년이후서구거대공산당중가장 “사회민주주의”적이었으며지금도그러하다. 이는물론이딸리아공산당이남아있는유일한것이기때문이다.

1648년의계몽된전제국가와 1945년의대중적공산당이나스딸린주의적국가의존재간의연계는 농업문제이다. 프랑스를원형으로하는이들국가는 농업의 자본주의화를가속화하기위해창출된것이었다. 의식적이건아니건, 이들국가는소비예뜨국가가러시아농민들에게 1928년부터계속해오던것, 그리고자유적자본주의체제들이 19세기에했던것과동일한무언가를자국농민들에게하고있었다. 계몽된절대국가들은세금을통해축적의원천으로서농민들을약탈하였다. 이러한방법들은 “깔뱅주의적”국가들에이미도입된시민사회의성공에대한응답이었으며, 이들나라에서농업의빠른자본주의화는성공의관건이었고이는특히그리고우선적으로영국에서일어났다.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농업혁명이다. 그것이산업, 도시, 도시노동자를갖는것이가능케되기전에,토지로부터자유로워진노동력을위한잉여를가질만큼농업생산성에혁명을일으키는것이필요하다. (30년전쟁이끝나고종교전쟁이시작되던) 1648년까지이러한과정이성취되지않은곳에서, 이는하향식의국가주의에의해진행되어야했다. 이는대륙적인중상주의전통을창출했고이전통은프랑스혁명을경과하여보다성숙한중상주의로 20세기까지지속되었다. 이것이루이나뽈레옹의제2제국(1852-1870), 그리고특히비스마르크의프러시아와프러시아에지배된독일을특징지웠다..중상주의적전통과그것의영향에관해서는, Roman Szporluk, Communism and Nationalism: Karl Marx vs. Friedrich List, (Oxford UP 1988) 참조

특히후자는 1870년독일통일이후러시아를필두로전세계모든 “후발주자”들이모방하였다.

여기서 (이제시야에들어오는) 배링턴무어의틀에초점이맞춰진다. 1860년대는근본적인국면이었다. 이십년간미국내전, 독일통일, 이딸리아통일, 러시아의농노해방, 일본의메이지유신등이있었다. 제2제국에의한프랑스의산업발전과제3공화국의수립도덤으로첨가할수있지만, 이는부차적이다. 어느나라가 1870년까지 “내적으로재조직화”되지않을경우, 이나라는 1914년주요산업국가들의 “중심부(inner circle)”에속할기회가없는것처럼보였다. 둘째, 위에언급된다섯나라(다시한번프랑스는제쳐두자) 중네나라는 1933년까지전체주의적/권위주의적중상주의국가를갖고있었다. 주요국가들중최초의북대서양자본주의경제(영국,프랑스, 미국)에주도적으로참여한나라들만이 1930년대에권위주의적인중상주의적해결책을피할수있었고, 1860년대에재조직화된다섯나라중미국만이이에해당되었다. (이는전(前)산업적인역사적경험의중심성에대한중요한단서이다.) 왜 1860년대가그렇게명백한결절점이되었는가? 이에대한답은 1873년의세계공황,특히 농업 공황인것처럼보인다.. 1873년의농업공황의충격이후에관한논의에관해서는, Hans Rosenberg, Grosse Depression und Bismarckzeit, Berlin 1967을참조하라.

미국,캐나다, 아르헨티나,호주, 러시아가세계곡물시장에주요수출국으로등장했을때, 이는 1648년의대치(代置)를그대로다시재현하였다. 1873-1896년간의농업공황에대한반작용으로대륙의모든국가들은자국의국민농업을보전하기위해보호주의로이동해야만했다.가장대표적인경우가 1879년독일에서있었던기업가들과융커들간의 “철과호밀”동맹이었는데이를통해독일자본주의와자유주의는융커가지배하는프러시아/독일국가에최종적으로종속되게되었다. 그러나이와유사한각본들이프랑스, 이베리아, 이딸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연출되었다. 미국,캐나다, 아르헨티나,호주등이세계농업시장에등장함으로써 1세기이상동안유지되어온선진자본주의적발전의기존핵심부주위에선이그어지게되었다. 1890년경에는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바르셀로나까지밀을운송하는게 100마일떨어진내륙으로수송하는것보다더비용이적게들었다. 대륙중상주의국가들의농업부문은국제적으로생존할수없게되었다. 이러한상황이노동자운동의발전에미친영향은그것이받아마땅한관심을이제까지누리지못했다.

혁명적전통은사회주의/공산주의를본래프랑스혁명이후제삼신분의폭발로부터성장하는것으로보았다. 바뵈프에게있어서, 이는무엇보다도, 1848년프랑스와유럽다른지역에서일어난혁명을통해자꼬뱅좌파에서나타난과격분자(Enrages)와다른급진적집단들이다(여기에는 1848년영국에서정점을이룬차티스트들도포함된다). 역사는설득력있어보인다. 1793-1794년에서 1917-1921년에이르는선은 1830, 1848년의프랑스혁명과꼬뮨, 1914년까지의독일사민당의성장, 1905년과 1917년의러시아혁명들속에서프랑스로부터독일, 러시아로뻗어나가며, 독일, 이딸리아,영국, 스페인등에서의혁명에가까운상황과세계거의모든지역에서의반란적파업이나타난 1917-21년의실패한세계적혁명고조에서절정에이른다. 이후자는 “고전적인노동자운동”의정점이다. CLR 제임스는 1917-1918년독러전선의붕괴라는역사적순간을재구성할필요성에관하여이야기한바있다. 즉독일혁명의실패와세계적인혁명적파고의패배속에서, 세계혁명은지금까지최고의시간을가졌던것이다. 이러한궤도는레닌-뜨로츠끼정통의틀이다. 만약독일혁명이러시아를고립으로부터구해냈다면, 20세기는완전히다른경로를밟았을것이다. 역사에관한이러한견해는사회민주주의, 스딸린주의,마오주의, 제삼세계주의(Third Worldism) 등의모든함정을피하기위한매우유용한 “발견적장치(heuristic device)”였다. 뜨로츠끼주의자건, 제삼진영이건,혹은초좌파건간에이러한전통속에서사는것은 1917-1921년의독일과러시아의소비예뜨라는관점에서역사를판단하는것이다. 이는역사적평가라는점에서는전혀나쁜기준점이아니다. 케인즈주의적복지국가, 최초5개년계획에서의스딸린주의의성공, 혹은중국의사회주의사회라는개념으로서의노동집약적인민공사(agrarian commune) 등보다이는확실히우월하다. 그러나이는막다른곤경에봉착한다. 이는사람들로하여금 1920년의코민테른전략가로서역사를보게끔하며,호헨쫄레른, 합스부르크,로마노프등의왕조에대항한혁명이일어난중부와동부유럽을떠맡는것을당연시하게한다.그러나역사적균열은현재로부터이들혁명을분리시키며, 따라서이중적성격을구분한다.. 독일의극좌파인헤르만고르터는 1921년에이미러시아혁명과서구의가능한혁명간의차이의본질로서서구노동자들에있어서의농업문제의부재를,혼란스럽지만정확하게, 파악하고있었다. 이차이는레닌의 『좌익공산주의,유아적혼란』에서는과소평가되었다. H. Gorter, Offener Brief an den Genossen Lenin, Berlin 1921 참조.

10월혁명의 이중적 성격은부르조아혁명의역사적과제들이노동계급의지도하에서실현되고, 그후프롤레타리아적인정치적내용이스딸린주의적반혁명에의해일소된혁명의성격이었다. 러시아혁명을 20세기의시금석(누군가말했듯이, “역사의비가역적전환점”)으로만들기위해, 20세기초반의맑스의정확한연장으로서레닌에서뜨로츠끼로이어지는 “연속”선을무비판적으로긋는것은 1917년이전과이후의모든역사관을 “매수”하는것이다. 이는무엇보다도, 독일사민당이”수정주의”에지배되었던 1890년, 1898년,혹은 1914년보다앞선혁명적맑스주의의형성으로서의독일사회민주주의에관한신화를받아들이는것이다. 현재문제가되는 “독일사회민주주의와러시아볼셰비즘이라는최선”에의해알려진견지의근저에있는하나의신화가있다면, 이는초기독일사민당에관한장미빛관점이다. 이는국제적좌파가계몽된전제국가의공무원에서기원하는계몽주의(Aufklaering) 렌즈의식민지가되었다는견해를통한것이다.

우리는이러한막다른곤경을다양한수준에서볼수있다. 원래독일사민당에집중되었고, 후에는제2, 제3,제4인터내셔널의볼셰비끼당에집중된, 고전적노동자운동의일용품(bread and butter)이었던 “속류”비맑스주의적유물론부터논의해보자.

1844년수고, 자본내의헤겔주의적 “지문(指紋)“,『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요강(Grundrisse)』을 발견한 이후 코르쉬 등의 많은 사람들이 자문했듯이,고전적노동자운동은어떻게 “속류맑스주의”에지배되어올수있었는가?왜칸트이전의유물론(즉,맑스의유물론과는달리, 독일이상주의와포이에르바하와의대화를거치지않은유물론)이영불계몽주의의 18세기유물론, 즉부르조아혁명의이데올로기와그렇게유사하게보이는가? “그들은잘못된사고를갖고있었다”는심리학적/도덕주의적판단을맑스주의가거부한이후, 어떻게속류맑스주의의역사적헤게모니에관한맑스주의적설명에도달하는가? 이에대한답은그리복잡해보이지않았다. 1860년에서 1914년까지독일사민당에집중되고러시아혁명에의해연장된고전적노동자운동의유물론이부르조아적성격의혁명적유물론과인식론적으로거의다르지않았다면,중부유럽과 동부유럽의 고전적 노동자운동이 부르조아 혁명의 연장이었음에틀림없다. 영웅적인초기독일사민당의숭배자로자신을위치지운다면, 이치에맞는다른설명을생각해내는것은쉽지않다. 결국이는불균등결합발전이라는뜨로츠끼의이론에서그리멀지않다. 부르조아가미약하고구체제를유지할능력이없는곳에서, 그임무는노동계급에게떨어진다.(뜨로츠끼의노력은노동계급이사회주의혁명을이루고있다는것을믿기위한것이었다.) 이속류맑스주의는후기엥겔스의대중용소책자와, 레닌과볼셰비끼를교육시킨제2인터내셔널의회색저명인사들인베벨, 카우츠키, 빌헬름리프크네히트, 전수정주의적베른슈타인, 쁠레하노프등의저작에서표현된 “세계관”을제공했다.레닌이 1910-1912년에야카우츠키와독일사민당을정통의 “중앙”으로보기시작했다는점과 1914년독일사민당이전쟁공채에찬성표를던졌다는신문보도를믿을수없었다는점을잊어서는안된다. 그는이들영향에그만큼가까웠다. 그는독일사민당의붕괴를설명하기위해 『제국주의』를저술했다. 후에뜨로츠끼는전후서유럽에서의패배를설명하기위해 “혁명적지도부의부재”를덧붙였다. 1914년 9월독일사민당의패주(敗走)를이해하기위해헤겔의논리학을읽으려고쮸리히도서관으로달려가던레닌에대한라야두나예쁘스까야의묘사. Raya Dunayevskaya, Philosophy and Revolution, (New York 1975), Ch. 3.

는외경(外經)적일수도있고, 그렇지않을수도있다. 하지만, “후기레닌”은 1917년이후제4인터내셔널을포함한공식적맑스주의에아무런영향도미치지못했다. 루카치와코르쉬의철학적견해는 1923년코민테른으로부터조롱받았다. 1960년대중반미국의보다지적으로기민한환경속에서, (1968년이후프랑스, 독일, 이딸리아로부터쇄도한번역물의파도에앞서) 맑스주의의철학적배경이라는문제에관한가장정교한글은시드니훅의 『칼맑스의이해를향하여(Towards an Understanding of Karl Marx)』였을 것이다. 이는누구의잘못도아니었다. 이는단지맑스초기저작들의발견, 맑스가헤겔에진빚의진정한범위,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에 있는 속류 유물론에 대한 비판,그리고 『요강』 같은저작등의충격이 1950년대와 1960년대의소규모사회주의자서클을사실상넘어섰다는사실을반영하는것이다. 그러나이에는역사적인원인이있어야했다. 그것은단지언제어디서무엇이출간되었는가의문제는아니었다(한예로 “요강”은 1941년모스크바에서독일어로 200부만최초로출판되었다).

그러나맑스주의와노동계급의역사에있어서의이러한이데올로기적시대착오의핵심이앞서말한대로 “그들은잘못된사고를갖고있었다”가될수는없다. 해답은축적의역사의보다깊은차원에놓여져야하며그것이어떻게계급투쟁을국제적으로어떻게모양지웠는가여야한다. 보르디가의전통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의전반적논쟁들에한계적인전망들, 즉내생각에, 농업문제, 자본주의적축적의시대구분, 사회민주주의와볼셰비즘의진정한역사적역할, 17세기의계몽된절대주의와 20세기의대중에기반한공산주의정당들간의역사적연계등을결합시키는전망들을다시한번밝혀내었다.

이들문제를밝히기위해발전된가장흥미로운전망은보르디가에영향받았지만맹목적이지는않은프랑스의조류인 “신보르디가주의”에의한것이었다.이들은소비예뜨, 노동자평의회,노동자민주주의의역사적중요성에둔감했던, 모든것을당내에위치지웠던보르디가를, 노동자평의회를찬미하고 1917년이후잘못되어버린모든것을 “레닌주의”라는용어로설명했던독일과네덜란드의극좌파와종합하고자하였다.

모든프랑스의조류는맑스의한텍스트를중심무대에놓았는데이는 1950년대와 60년대에빛을보기시작한다른새로운저작들보다중요한것이었다:소위 『자본』 1권의 “미간행된 6장”이그것이다.. 미간행 6장은펭귄사간자본 1권의새로운영역본(New York 1976)의부록이다.

맑스가왜자본 1권의원래판본에서이장을삭제했는지는알려져있지않다. 그러나이장은일종의유물론적 “정신현상학”이다. 맑스가 “후기에” 헤겔을잊어버렸다는알뛰세르주의자들의주장을반박하는데는열쪽이면충분하다. 그러나헤겔의방법과의연속성에대한긍정은이장의최소한이다. 이텍스트에서정교화된근본적범주들은절대적잉여가치와상대적잉여가치의구분, 노동에대한자본의 “형식적” 지배와 “실질적” 지배에상응하는, 맑스가”외연적”축적국면과 “내포적” 축적국면이라고지칭하는것간의구분이다. 이들구분은매우이론적인방식으로삽입되어있다. 맑스는이들구분을역사에보편적으로적용하려하지는않는다. 그러나프랑스의극좌파는정확이이들구분을둘러싸고자본주의역사를시기구분하기시작했다. 자본주의역사의 “외연적” 국면과 “내포적” 국면은맑스주의자들에게독특한것은아니다. 부르조아경제사가들도이개념을기술(記述)적도구로사용해왔다. 한조류는이구분을본질적으로 “노동자를프롤레타리아로탈실체화시키는국면”으로요약하였다.. 프랑스그룹인 ‘부정(Negation)’의팜플렛, Lip and the Self-Managed Counter-Revolution(‘흑과적(Black and Red)’ 영역, Detroit, 1975)를참조하라.

새로운노동사라는거트먼(Gutman)학파전체에대한비난이이구절에들어있다. 6장에서 “내포적” 축적으로의이행은, 20세기선진자본주의세계의대량생산과정에대한간명한정의인 “추상노동의가장일반적인자본주의적형태로의노동의축소”에주어진다.

“미간행된 6장”은또한맑스주의내의 “헤겔르네상스”와,왜맑스의헤겔주의적배경에대한진지한관심이 1920년대독일에서최초로나타났고(루카치, 코르쉬, 프랑크푸르트학파) 프랑스에서는1950년대에확립되었는가에빛을비추는것이다. 기실,속류맑스주의는 1930년대와 1940년대,즉인민전선과레지스땅스시기에프랑스에서–그리고지식인들사이에서– 유행하는이데올로기가되었을뿐이다. 무엇이프랑스와독일의 30년이라는격차를설명할수있을까? “헤겔주의화된” 맑스주의와우리가 “내포적축적”과 “실질적지배”라고부르는바의조건들간에는어떤연관이있는것처럼보인다. 이딸리아가프랑스에훨씬앞서정교하고훨씬더”독일화된” 맑스주의문화를가졌다는것도이상하다. 이는또한,최초의북대서양자본주의경제와 1770-1815년의부르조아혁명의파도에프랑스가참여한것과대조적으로, 정치적 “후발자”로서의이딸리아의지위와어떤점에서는관련이있음이틀림없다. 꽁뜨,생시몽, 게드와연관된합리주의, 조레스의칸트주의적이상주의나, 심지어무정부주의전통의합리주의(반성직권주의적인과학에대한믿음과함께하는), 혹은마지막으로제3공화국의”세속적이고공화주의적인실증주의(positivism laique et republican)” 등을통해표현된프랑스의자꼬뱅전통은칸트이후독일사상의지평에여전히남아있었다.이딸리아는 1890년대에 “독일화”되었다. 프랑스는1930년대와 1940년대에서야그렇게되었다.

레닌-뜨로츠끼전통은자본주의의역사를두국면으로나누는데, 이는 “제국주의적부패의시대”를개시하는일차대전으로구분된다. 이이론의이론적원천은홉슨, 힐퍼딩, 레닌등의일차대전에앞선 “독점자본” 논의로부터나온다. 제2인터내셔널전성기의자본주의는맑스가묘사한체제와다른것처럼보였다(자본 2권과3권이 1880년대와 1890년대에이르러서야볼수있었다는점을기억하는것이중요하다. 가장사회주의적인투사들의 “맑스주의경제학”과의관계는자본 1권으로부터였고보다사실적으로는 『임금, 가격,이윤』 같은대중용팜플렛으로부터였다.) 자본주의는 “경쟁” 혹은 “자유방임” 국면으로부터카르텔,독점, 제국주의국가의지도, 금융자본의등장, 군비경쟁, 식민지획득등의국면으로이동하는것처럼보였다.이들모두는 1910년경힐퍼딩이 “조직된자본주의”라고부른요소들이었다. 일차대전은하나의전환점이었다. 러시아혁명은, 레닌의구절속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은모든파업배후에잠복하고있다”는것을보여주였고1917-1921년간은이를거의확실하게하는것처럼보였다. 이후 1929년의덧없는안정후에세계공황, 파시즘, 스딸린주의, 이차대전이도래했고, 이번에는끊임없는민족해방전쟁이뒤따랐다. 1950년에누가이시기가 “제국주의적부패의시대”라는것을부정할수있었겠는가?이들현상이전체적인세계관을굳게했고, 이는코민테른의초기몇년간에최초로성문화되었다. 부하린에의해가장훌륭하게표현된 1914년이전시기의카우츠키주의의속류맑스주의, 뜨로츠끼의영구혁명과불균등결합발전이론, 그리고코민테른대회의 “제국주의적부패”의시기라는성격규정간의연속성이그것이다. 1905년과 1917-1921년의독일-폴란드-러시아의회랑(corridor)의혁명적잠재력과재연계하려는 60년대후반과 70년대초반의최선의시도들속에서다시포착되었을때이는적어도그러한유산의응축된표현이었다. 현대역사에대한이러한시대구분으로인해사람들은 “1920년의모스크바로부터” 세계를바라볼수있었고, 이는다시 1917년에서 1928년에이르는러시아혁명과코민테른의역사의해결을중심적이고분명하게함축으로가득찬것으로만들었다. 그역사속에는그것이뜨로츠끼주의적이건, 샤흐트만주의적이건, 아니면극좌파적이건간에철학자의기념비가있었다. 1970년대중반까지이는사회민주주의, 스딸린주의,혹은제삼세계의보나파르트주의에아무런환상도없었던사람들, 즉, 소비예뜨/노동자평의회등의혁명적노동자민주주의라는견지에서이이념들에반대했던사람들의관점이었다. 한차원에서, 이는 1970년대까지세계에대한완전히조리있는설명인것처럼보였다. 독일과러시아에서혁명적노동자운동의최고의표현이벌어지지않았던가? 그이후모든것이재앙과관료주의의악몽이아니었던가?보르디가가1950년대언젠가 “한지역(그에게있어유럽과미국)에서의사회적발전(evolution)이마지막국면의문턱에도달했다는사실이지구다른지역에서벌어지고있는것이사회적으로중요치않다는것을의미하지는않기때문에”라고썼을때, 그는이러한태도를예견했다. 누가중국이나북한, 알바니아, 혹은민족해방운동들과그들의국가를미국이나유럽노동자들의모델로서진지하게제기할수있었겠는가? 그러나그러한견해는옳기는했지만충분하지는않았다.

 

아닌가?

 

왜냐하면이는 1970년대중반이미진행중인두가지현실을무시했기때문이었다. 이전의모든전망이의존하고있었던서구노동계급운동을무너뜨리기일보직전까지와있던, 제삼세계의산업화와선진부문의기술집약적(“하이테크”) 발전이라는이중적운동말이다. 1970년,농민-관료제적혁명들에대해스딸린주의, 마오주의, 제삼세계가도취해있던와중에, 계급사회를실제로종식시킬수있는유일한계급으로서서구노동계급을보는것은옳았고혁명적이었다. 오늘날 (상당히약화된) 그찌꺼기를거부하는것이필요한것처럼, 당시제삼세계주의의꿀꿀이죽같은선전을거부하는것이필요했다. 그러나그이래변화한것은물론서구의탈산업화와제삼세계의산업화(이는동전의양면이다)가제삼세계자체에진정한노동자운동을창출했으며,남한이가장최근의중요한사례라는점이다. 70년대중반까지세계는앞서묘사한초기의영웅적인코민테른의관점으로부터외삽적으로추정될수있었던바와아주흡사해보였다. 1914년에세계산업의핵심부였던국가들(서유럽, 미국, 일본)은여전히핵심부였다. 초기논의에서보면, 한나라가 1860년대에 “내적으로재조직”되지않았다면 1914년에 “산업클럽”에들어가지못할것이었고 1975년경에도여전히그럴것이었다. 아울러, 선진산업국가들의제조업부문노동자의비율은, 1900-1914년경독일과영국에서 45% 정도로정점에올랐는데, 1970년대초반선진자본주의지역전체에서여전히그수치에가까웠다. 그사이시기에무엇이변했는가? 분명,선진자본주의세계는 1900-1914년간제조업 45%, 농업 45%, 화이트칼라서비스업 10%라는노동력통계로부터제조업 40-45%, 농업 5-10%, 화이트칼라서비스업 40-45%로변화했다(세기전환기에는겨우등장하기시작했을뿐인대규모군산부문의창출은차치하고라도말이다). 이는무엇을가리키는가? 자본주의적발전의 “줄거리”가다음과같다는것을가리킨다. 1815-1914년간 “고전적”혹은 “경쟁”자본주의국면에, 이체제는적어도영국, 미국, 프랑스,독일에서는일차적으로농민을노동자로전화시켰다. 1914년이후기간인 “조직”자본주의, 즉 “독점”자본주의의새로운국면에, “제국주의적부패의시대”는서구세계(와남미, 카리브해지역, 남부유럽과아프리카)의농촌인구를계속해서고갈시켰지만,무엇을이루기위한것이었던가? 산업노동력을계속해서확장하는대신, 이시대는계속증가하는화이트칼라 “서비스부문”(과무기생산)을지탱하기위해노동력의정체된비율의거대하게증대한생산성을활용하였다. 그러나기본주제로돌아가자면, 공산주의정당들은, 문제가되는국가의농업인구가노동력의소규모(5-10%)로축소되는바로그순간에, 부식되고통합된(integrated) 사회민주당유형의정당에의해지양되기시작했다. 이것이예를들어프랑스나스페인에서지난 15년간일어난일이었다.

이것은포르투갈에서는일어나지않은것이었는데,왜냐하면소생산농업이여전히포르투갈노동력의중요한비율을차지하고있기때문이다.이는이딸리아공산당의변질의배경이다. 이는북유럽과미국에서오래전에일어난일이다. 마지막으로,이는, “외연적” 축적국면이완성되고 1914-1945년의위기를통해서구가도달한내포적국면으로이동하는시기에, 동유럽과소련이맞닥뜨린문제들과완전히대등한것이다. 간략히말하자면, 17세기의계몽된절대주의로부터 20세기의공산주의정당들에이르기까지, 문제(the problematic)는외연적축적국면의그것-농민의노동자로의전화-이라는점이다. 이말의궁극적함의는한사회는노동력의소규모비율이농업에고용되어있을때에만완전히자본주의적이라는것, 다시말해한사회는외연적/형식적축적국면에서내포적/실질적축적국면으로이동했을때에만완전히자본주의적이라는것이다. 이말의의미는, 간략히말하자면, 1900년에는유럽과미국모두사회주의운동이생각하는것만큼자본주의적이지않았다는것, 그리고 고전적 노동자운동의 주류가 자본주의를 내포적 국면으로 몰고간 최초이자 주요한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자본주의는무엇보다도농업혁명을의미한다.

농업문제는국제적좌파의역사에있어많은의미를지녀왔다. 이문제는프랑스와러시아의혁명들,내전을통한미국남부에서의농업의자본주의화, 1873년이후의농업공황, 이차대전이후유럽농촌의공동화(空洞化)와동반된농민혁명들과의연계하에나타났다. 의심의여지없이, 이들혁명은부주의하게일괄처리되어선안되는구별되는현상이다.하지만 “완전한자본주의” 사회의정의로서인구의 5-10%로농업노동력이축소되는것과연관된내포적축적에초점을맞추도록하자. 이러한의미에서 “농업문제”는 1789년프랑스에서해결되지않았지만 1945-1973년에는해결되었다. 농업과산업에서의내포적축적간의연관은노동자의소비목록의부분에서식료품비의축소이며, 20세기대량생산의중심으로서 (자동차등의)소비재에대한구매력을창출하게된다.

요약한후다시한번보르디가와신보르디가주의자들에게돌아가보도록하자. 속류맑스주의는부르조아혁명을완수하기위한전투에서중부와동부유럽의노동자운동과연계된지식인들의이데올로기였다(제2인터내셔널과제3인터내셔널의맑스주의). 이이데올기와칸트이전의, 그리고 1789년이전의부르조아유물론과의유사성은 “오류”(“그들은잘못된사고를갖고있었다”)의결과가아니라이를발전시킨운동이가졌던진정한내용의정확한표현이었다. 그내용은외연적/형식적지배와내포적/실질적축적이라는개념으로레닌/뜨로츠끼의 “제국주의적부패의시대”를보완하는자본주의역사의시기구분의틀속에서궁극적으로의미를갖게된다. 이제 “조직자본주의”와 “독점자본주의”에관한레닌/힐퍼딩류의제2인터내셔널의이론전체는외연적으로부터내포적으로의이행의엄폐(occultation)가된다. 따라서”공식적맑스주의”의관점은,권력의지위에있건없건, 발생중인국가엘리트의관점이며, 이의운동은자본주의의또다른형태(실질적지배)로귀결되고 “사회주의”로불리게된다. 이러한분석을강요하는것은이이론이도덕적교화를회피하고 “인식론”에대해 “사회학적” 설명을부여한다는것이다. 다시한번이것이의미하는바는이사회계층이개발정체(regime)의국가공무원의원형태(原形態)였기때문에 유물론의계몽주의적(Aufklaering) 형태를지녔다는것이며, 레닌의제국주의이론에의해성문화된이의경제학또한그계층의경제학이었다는것이다. 그것은진정한맑스주의가아닌데, 왜냐하면생산관계와생산력의분석을 (궁극적으로듀링주의적인) “세력”의분석으로대체하는경향이있기때문이다. 레닌과부하린으로부터바란, 스위지, 베뜰레앵, 아민을거쳐폴포트에이르기까지 (엄청난불연속성과퇴보, 그리고또한연속성을인정하면서) “독점자본” 이론은국가관료들의이론이다. 이는근본적으로반노동계급적이다. 이이론은서구노동계급의개량주의를제국주의의초과이윤의표현으로보며, 국가관료엘리트와, 이들이집권하고있는저발전국가의농민과노동계급간의이해의차이를애매하게한다.

프랑스의신보르디가주의자들,특히까마뜨는맑스주의가 “물질적인간공동체”의이론, 즉성숙된자본주의로부터 “태어나는” 진정한 운동으로부터후진적원시자본주의(proto-capitalism)에서 건설되는” 무언가로변형된것은무엇보다러시아에서였다는것을보여주었다. 이는 1878-1883년간맑스가발전시킨러시아문제에관한 “맑스주의적입장”과 1890년대인민주의의마지막국면과벌인볼셰비끼의논쟁간의대조에의해보여진다. 공산주의로의직접적인 “도약”을위한가능한기반으로서러시아공동체(commune)를연구하면서맑스가어떠한희망을가졌건간에, 그는,뜨로츠끼가 1936년에쓴것과같이, “사회주의는수천킬로그람의강철과콘크리트속에서이제자본주의와맞서고있다”라고한번도쓰지않았다. 물론맑스의저작에이와같은생산력주의적담론을위한근거가없다고말하고자하는것은아니다. 단지제2, 제3(또한제4)인터내셔널의맑스주의모두로부터맑스를분리하는심연은그가세계에대한국가공무원의관점을표현하는 “전칸트주의적” 유물론과 “독점자본” 경제학을훨씬넘어서고있다는것이다. 1890년대레닌과인민주의자들간의전투, 이잘려진제2인터내셔널의”맑스주의”를러시아로도입하려는전투속에서,이후보르디가에의해발견된, “러시아문제”에대한맑스주의적분석의 1883년이전의차원전체는생산력주의의합창속에서완전히길을잃었다. 속류맑스주의에의해역사의 “단계”이론으로인계된, 계몽주의역사사상의핵심인 “진보”에대한직선적, 기계론적긍정은맑스와는달리러시아농촌공동체에아무런동정도갖지않는다. 물질적인간공동체(Gemeinwesen)라는공산주의의궁극목적(telos)은생산력주의를위해억압된다.권력을잡게되자, 볼셰비끼는자본 1권의재생산도식과범주를경제계획을위한지침서로번역하였는데,이들은이것이맑스가자본 3권에서침식하는 “리카르도주의적”자본주의설명이라는점을알지못했다. 이는 1928년이후스딸린주의계획자들의 “steeleater” 이데올로기를위한길을닦아주었다. 맑스와제2인터내셔널, 그후의볼셰비끼사이에는이미 “철학”과 “경제학”으로표현되는하나의세계가있으며,이들차이는노동계급과국가공무원이라는두가지다른계급의관점에근원을둔서로다른 “사회적인식론”을표현한다.독일사회민주주의와러시아볼셰비즘의최고치가절망적으로국가와뒤엉켜있다고말하는것이의미를갖게되는것은이러한지점에서이다. 혁명적전망의갱신은이제더이상직접적상속자로서스스로를정의할수없으며,맑스주의가자신에외재적인국가주의적담론과융합되는지점에대한우회로서정의할수밖에없게된다.

오늘날서구에있는우리는, 1910년의혁명가들과는달리, 완전히자본주의적인세계에살고있다. 달성해야할농업의자본주의화도없으며노동자운동이직면하는농민문제도없다. 이와동시에, 1930년대에맞먹는심화되는세계경제위기의와중에, 모든낡은혁명적전망은사라졌으며, 자본주의를넘어서는세계에대한긍정적전망은그어느때보다도불분명하다. (최근의역사는많은부정적대안들의사례를보여준다.) 하지만, 오늘날붕괴하고있는것의대부분이궁극적으로계몽된절대주의국가의유산과이의현대적확장들임을이해할때,우리는극히최근까지이용된개념적도구들의대다수가궁극적으로, 실질적인국가공무원이건잠재적국가공무원이건, 국가공무원들이이끈운동들에의해발전된부르조아혁명의완성을위한도구들이었다는점을볼수있다. 맑스주의를이러한국가주의적유산으로부터해방시킴으로써우리는마침내 “우리눈앞에서펼쳐지는진정한운동”(공산당선언)의관점에서세계를이해하기시작할수있다.